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포레토 전투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1915년 [[이탈리아 왕국]]이 [[삼국 동맹]]을 파기하고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]]에 선전포고한 이래, 오스트리아-헝가리는 발칸 전선, 동부전선에 이어 이탈리아 전선까지 강요받게 되었다. 발칸 전선은 독일의 도움과 불가리아의 개입으로 정리했지만 이때 오스트리아-헝가리가 입은 피해는 안 그래도 취약한 오스트리아-헝가리의 동원병력 규모와 맞물려 오스트리아-헝가리에게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하였으며, 결국 1916년 동부 전선의 오스트리아-헝가리군을 목표로 한 [[러시아 제국]]의 [[브루실로프 공세]]가 성공하는 요인이 되었다. 여기에 [[트란실바니아|에르데이]]를 노린 [[루마니아 왕국]]이 협상국 편으로 새로 참전하면서 가뜩이나 부담이 심한 동부전선의 길이가 종전보다 훨씬 길어졌다. 루마니아의 공세는 독일의 진두지휘 아래 독일 & 오스트리아-헝가리 & 불가리아 3개국군이 역으로 밀어버리면서 대충 수습하긴 했지만 1916년 말 이중제국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황제 [[프란츠 요제프 1세]]의 사망까지 결부되어 이중제국은 급격히 흔들리고 있었다. [[러시아 혁명]]으로 무너진 [[러시아 제국|제정]]을 대신해 새로 들어선 [[러시아 공화국|임시정부]]가 아직 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서, [[독일 제국군]] 수뇌부는 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의 이러한 상황을 염려했고, 또 계속되는 이탈리아의 공세로 오스트리아-헝가리가 행여 무너지지 않을까 우려했다. 실제로 [[이탈리아 왕국군]]은 카포레토 전투 이전까지는 오스트리아-헝가리를 상대로 대체로 공세적인 모습을 보였으나, 알프스 산맥의 괴물과 같은 지형에 제대로 된 성과도 없이 삽질성 공세를 남발하는 걸로 전락했고, 이미 상황이 말이 아니었던 오스트리아-헝가리 측도 전선을 유지하는 방어전에서는 좋은 성과를 냈지만 근본적인 역습을 가하는 능력이 없었다. 1917년 무렵에 들어가서는 오스트리아-헝가리군과 이탈리아군은 매번 전투를 벌일 때마다 쌍방에 막대한 피해를 강요하면서도 별 성과도 없는 충돌을 지속했으며, 이 와중에 숱한 장병들이 전투보다 [[알프스]] 산맥의 혹한과 낙설, [[산사태]] 등에 죽어나갔다. 이미 [[이탈리아 왕국군]]과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군]]은 1915년 1차 이손초 전투를 시작으로 1917년의 11차 이손초 전투까지 양군 합계 100만명에 달하는 누적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이었다.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Battles_of_the_Isonzo|#참고]] 양측 모두 병력을 수도 없이 갈아넣었으며, 이탈리아 전선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탈리아와는 달리 동부전선에서 이중전선을 부담해야 하는 오스트리아-헝가리군의 전력이 서서히 이탈리아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여 오스트리아-헝가리에게 매우 큰 부담이 되고 있었다. 자세한 것은 [[이손초 전투]] 항목 참조. 한편, 합스부르크 이중제국의 새로운 황제 [[카를 1세]]는 제11차 이손초 전투의 패배 이후 독일의 [[빌헬름 2세]]에 구원을 요청하며 '''계속되는 이탈리아 전선의 압박'''을 호소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'''오스트리아-헝가리가 이탈리아 전선에 총력을 다할 테니 독일이 대신 동부전선 전부를 맡아달라'''는 요청을 한다. 빌헬름 2세와 논의한 [[독일 제국군]] 총참모장 [[파울 폰 힌덴부르크]] 원수는, 오스트리아-헝가리의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이탈리아 전선에 독일군을 파병하여 직접 전투에 나서기로 결정했다. 이 전투의 규모는 초기에는 주의분산용으로 기획되었으나, 최종적으로는 이탈리아 군에 통렬한 일격을 가하여 전선 주도권을 되찾는 것으로 전략목표를 변경하기에 이른다. 본격적인 공세를 하기로 합의한 뒤에도 양국은 전략에 있어 의견 차이를 두었다. 오스트리아-헝가리군은 전 전선에서의 일제적인 공세를 제안한 반면 독일군은 관전단을 통해 전선을 유의깊게 살펴본 후 이손초 강 유역 북쪽에 위치한 카포레토를 공세지역으로 삼고자 했으며, 결국 독일군의 주장[* 다만 이것은 오스트리아-헝가리의 장군인 [[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]]의 작전을 바탕으로 두었다.]대로 카포레토 방면에서의 공세가 결정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